햇빛이 유리처럼 부서져 눈부시게 내려앉은 푸른 물결을 가르며 나는 성큼성큼 바다로 나아 갔다. 바다. 오직 이 순간을 바라왔다. 한 발짝 내딛는 걸음마다 다정한 파도는 내 무릎을 적시고 허리춤을 감싸고 손가락 사이로는 투명한 바닷물이 흩어진다. 머리 위로 펼쳐진 드높은 하늘과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이 만나는 황홀한 풍경을 천천히, 두 눈에 꼭꼭 담는다. 이내 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나는 바다에게로 온몸을 내던진다. 흐르는 물살과 흔들리는 산호, 자유로운 물고기 떼. 모든 존재가 하늘하늘 춤추는 곳. 아득하고 먹먹한 바닷속을 부드럽게 헤엄치며 마침내 한 단어에 당도한다. 아, 행복해. 바다를 만나는 날은 이토록 충만하고 벅차다.
너는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아는 것 같아.
별 일 없는 안부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탁구공 마냥 주고받다 오랜 친구의 한 마디가 마음을 덜컹 멈추게 했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반복되는 매일의 노곤함, 알 길 없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숨쉬듯 털어놓았다. 한껏 쪼그라진 마음. 산다는 건 대체로 내 안에 흐르는 것들을 짜내고 비틀어야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피가 돌고 땀이 나고 눈물을 쏟아야만 얻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마음의 살갗이 거칠어질 때마다 나는 나를 통통하게 부풀리기 위해 바다로 향했다. 음악을 듣고 바람을 맞으며 마음 가는대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오렌지빛, 핑크빛, 보랏빛, 색색으로 물드는 선셋을 향해 달려갔다.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 위로 작디 작은 별들이 환한 빛을 뿜어낼 때 그 아래에서 눈을 감고 떠올렸다. 이것을 보기 위해 이리 달려왔구나. 아름다운 순간. 내게 주어진 시간의 조각들이 향기로워질 때 나는 거울을 보지 않고도 어떤 얼굴이 되었는지 알았다. 겨운 얼굴. 충분히 누리고 있는 이의 살아 있는 표정.
그 찰나의 행복들이 삶을 촉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나는 온몸으로 안다.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제 발로 성큼 찾아와 주는 아름다움도 있다. 매섭게 서늘하던 공기가 사라지고 달큰한 봄의 기운이 감돌 무렵, 애정하는 팟캐스트에 이런 대화가 등장했다. 동네를 오가다 눈길이 가는 나무 한 그루를 ‘내 나무’로 정해두고 그것의 변화를 관찰하는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 새순이 돋아나는 순간, 꽃잎이 피고, 지고, 앙상해지다 다시 푸른 기운이 샘솟는 생의 모든 흐름을 같은 자리에서 매일 지켜보는 일. 좋은 걸 좋다고 기꺼이 말할 줄 아는 두 명의 낭만가들은 계절이 지나는 풍경, 사사로운 일상에 녹아있는 작지만 충만한 감각의 순간들을 때로는 호쾌하게, 뜨겁게, 또 어떤 때에는 한가롭게 들려주었다. 그렇지. 우리에겐 이미 수많은 아름다움이 곳곳에 널려 있지. 숨쉬고 있지. 우리가 할 일은 그것들을 발견하고 만끽하는 것. 눈을 맞추고 기운을 느끼며 가슴에 기억 속에 꼭꼭 채워두는 것. 누리고 나누는 기쁨을 수행하기. 기꺼이 살아서 삶을 살아내기. 가뿐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하기.
첨벙대는 바닷물을 헤치고 밖으로 나와 나는 일상의 자리로 돌아온다. 익숙한 태양을 맞이하고 늘 걷던 거리를 지나 뚜벅뚜벅 일터로 향한다. 그 길목에는 낮은 건물들 틈새로 머리를 드러낸 크고 울창한 내 나무도 있다. 아침 바람에 흐드러지는 나뭇잎. 그 사이로 살랑이는 햇살의 파편. 하얗게 반짝이는 빛에 잠시 시선을 건네다 이내 걸음을 이어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다. 온갖 향신료들이 그득한 곳. 저마다의 빛과 색과 향을 뿜어내는 존재들이 누군가의 삶 속에 들어가 아름다운 풍미를 입혀줄 채비를 마친 곳.
좋아하는 것들로 이만큼 볼록해져 온 마음을 또 다른 좋아하는 것에 가득 담아낸다. 나의 바다, 나의 나무, 나의 향신료. 여기 이 마음이 세상에게로 전해져 또 다른 아름다운 순간들이 이 땅 곳곳에 그득그득 넘쳐날 수 있게. 그것이 우리의 책무. 마땅히 누려야 할 사랑의 권리.
돌고 도는 사랑하는 마음은 매일의 시계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한다.
기꺼이 겨운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