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이름만으로 통하는 향신료는 많지 않다. 후추가 그 드문 예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우리는 그것을 '향신료'라기보다 일상의 평범한 식재료 중 하나로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어디에나 있고, 늘 비슷하게 쓰이는 존재. 하지만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면, 후추는 역할의 폭이 매우 넓어 곳곳에서 특유의 다채로운 얼굴을 드러내는 주요한 향신료가 된다. 어떤 곳에서는 검은 소스의 중심이 되어 이주민들의 땀과 열기를 응축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국가가 규정한 맛의 질서를 떠받치는 기준이 된다. 또 다른 부엌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방식으로 풍미의 깊이와 여운을 더하는 숨은 조력자로 작동하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향신료 후추를 통해 가장 먼 식탁의 풍경과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삶의 장면들을 들여다본다.

어둠이 짙게 깔린 말레이시아의 호커 센터(Hawker Center)는 낮보다 뜨겁다. 달궈진 웍 위로 고기와 해산물이 춤을 추고, 그 위로 윤기가 흐르는 검은 소스가 한 국자 끼얹어진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후추 특유의 알싸한 향이 폭발하듯 허공으로 퍼진다. 사람들의 위장을 무장해제 시키는 이 강렬한 향, 바로 말레이시아의 소울 푸드 ‘블랙 페퍼 소스(Black Pepper Sauce)’다. 누구나 쉽게 즐기는 이 흔한 소스 속에는 낯선 땅에 뿌리내려야 했던 이방인들의 치열한 생존기가 녹아 있다.
보르네오섬의 사라왁(Sarawak) 지역은 19세기 중반 영국 출신 모험가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 세운 백인 왕조(White Rajahs)가 통치하던 독특한 소왕국이었다. 당시 잦은 내전으로 재정이 바닥난 브룩 가문에게는 확실한 돈줄이 필요했고, 그들은 후추를 주목했다.

브룩 왕조는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게 숲을 개간하고 후추를 심도록 장려했다. 덥고 습한 사라왁의 산비탈은 농부들에게는 가혹했지만 후추에게는 천국이었다. 이주민들이 낮에는 산비탈을 깎아 덩굴을 올리고, 밤에는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하며 보낸 시간들이 쌓이자 사라왁은 어느새 세계적인 후추 산지로 거듭나 있었다. 사라왁 후추 특유의 우디하면서도 자극적이고 스파이시한 풍미는 척박한 땅과 농부들의 땀방울이 만들어낸 고유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훌륭한 후추는 어떻게 '소스'가 되었을까? 그 시작점에는 영국인 주인과 중국인 요리사가 있다. 식민지 시절, 영국 주재원들은 고향에서 먹던 스테이크를 그리워했다. 당시 주방을 책임지던 이들은 주로 하이난(Hainan) 출신의 중국인 요리사들이었다. 그들은 구하기 힘든 서양식 그레이비 소스 대신, 주방에 흔한 간장과 굴 소스 그리고 사라왁의 질 좋은 흑후추를 으깨 넣고 끓여냈다.

영국인의 스테이크 문화를 흉내 내다 탄생한 이 정체불명의 소스는 의외로 완벽했다. 중국식 장류의 감칠맛과 후추의 강렬한 매운맛이 기름진 고기 맛을 꽉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말레이시아식 경양식, '치킨 찹(Chicken Chop)'과 블랙 페퍼 소스의 원형이다.

서양식 요리에서 출발한 이 소스는 이제 국경과 인종을 넘어섰다. 말레이시아어로 '소스 라다 히탐(Sos Lada Hitam)' 직역하면 ‘검은 후추 소스’를 뜻하는 이 블랙 페퍼 소스는 오늘날 호커 센터에서 게, 새우, 볶음면, 볶음밥 등 어떤 재료를 만나도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마법의 존재로 거듭났다. “블랙 페퍼 스타일로 해주세요”라고 외치면 어디서든 통하는 고유한 단어가 되어버린 소스. 그 영향력은 마트 진열대마다 'Sarawak Pepper'라는 문구가 박힌 소스병들이 빼곡한 풍경을 자아내며, 이방인의 생존 수단이었던 후추가 어떻게 말레이시아라는 다민족 국가를 하나로 묶는 '국민 소스'가 되었는지를 증명한다.

동남아시아 지도 위에서 태국은 유일하게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를 겪지 않은 나라다. 덕분에 태국의 식탁은 타의에 의한 굴곡 없이 그들만의 고유한 미식(美食) 유전자를 온전하게 지켜올 수 있었다. 물론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라마 4세와 5세 시기를 거치며 왕실 식탁에는 포크와 나이프, 서양의 식재료가 올랐다. 하지만 태국은 낯선 재료조차 그들만의 방식대로 길들여 태국화(Thai-zation)시키는 놀라운 흡수력을 보여주었다.
태국 요리에는 보이지 않는 견고한 규칙이 있다. 맵고(Spicy), 시고(Sour), 달고(Sweet), 짠(Salty) 네 가지 맛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입안에서 폭죽처럼 동시에 터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맛의 구조에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필수 등장인물이 있다. 남쁠라(태국식 액젓), 마나오(라임), 프릭키누(태국식 고추)가 그 주인공이다. 남쁠라(액젓)는 소금만으로는 낼 수 없는 깊은 감칠맛을 더하고, 마나오(라임)은 묵직한 향미에 발랄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여기에 포루투갈에서 건너와 고유 품종으로 발전한 프릭키누(고추)가 더해지면 태국식 특유의 복합적인 매운맛이 완성된다.

그렇다면 후추는 이 화려한 오케스트라에서 어떤 악기를 담당할까? 태국식 흑후추 볶음 요리인 '팟 프릭 타이 담(Pad Prik Thai Dam)'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태국인들은 후추를 소스로 걸쭉하게 만들기보다, 절구에 거칠게 으깨어 기름에 볶아 향을 입히는 방식을 선호한다. 고추가 혀를 찌르는 직관적인 매운맛을 담당한다면, 흑후추는 코끝을 맴도는 알싸한 열기를 담당하며 맛의 빈 공간을 채운다. 말레이시아의 후추가 요리를 덮는 '이불'이라면, 태국의 후추는 재료 사이사이에 스며드는 '늪'에 가깝다.

태국에서 맛은 곧 국가의 얼굴이다. 태국 정부(상무부)가 주관하는 '타이 셀렉트(Thai SELECT)' 인증 제도는 이러한 자부심의 결정체다. 전 세계 어디서든 이 마크가 붙은 식당이나 제품을 만난다면, 그것은 태국 정부가 "이것이 진짜 태국의 맛이다"라고 보증한다는 뜻이다.
이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는 수많은 메뉴 중에서도 후추는 ‘팟 프릭 타이 담(Pad Prik Thai Dam)’과 같은 특정 정통 요리에서 그 존재감을 가장 선명히 드러낸다. 남쁠라(액젓), 마나오(라임), 프릭키누(고추)처럼 태국의 모든 식탁을 지배하는 주연은 아니지만, 볶음 요리의 세계에서 만큼은 그 정체성을 지탱하는 필수 기둥으로 존재한다. 수많은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끝내 자신들의 색깔을 잃지 않는 태국. 그 단단한 미각의 기준 안에서 후추는 꼭 필요한 순간에 등장해 태국의 풍미를 이루는 한 축을 완성하고 있다.
펜실베니아의 시골 마트 진열대는 화려하지 않다. 대신 그곳엔 투박하지만 정직한 시간이 놓여 있다. 지역 농가에서 짠 유기농 우유, 종이로 투박하게 감싸 놓은 묵직한 롤 버터, 흙이 채 가시지 않은 양송이버섯. 그리고 그 옆, 투명한 통에 가득 담긴 하얀 알갱이들이 눈에 띈다. 바로 백후추다.

마트를 나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검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과 전깃줄 없이 탁 트인 들판이 보인다. '플레인 피플(Plain People)', 즉 아미쉬(Amish) 공동체의 마을이다. 18세기 초, 종교적 박해를 피해 스위스와 독일에서 건너온 이들은 현대 문명의 속도 대신 자연의 리듬을 택했다. 이들이 일구는 펜실베니아의 땅 일대는 미국 버섯 생산량의 60% 이상을 담당하는 '버섯의 수도'이기도 하다. 자연스레 이들의 식탁에는 갓 짠 우유와 갓 따낸 버섯이 오르며, 소박하지만 깊은 풍미를 지닌 요리들이 탄생했다.

아미쉬의 식탁을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는 '가난한 자의 스테이크(Amish Poor Man’s Steak)'라 불린다. 이름은 가난하지만, 그 맛은 결코 빈곤하지 않다. 값비싼 스테이크용 고기 대신 다진 소고기에 빵가루와 우유를 섞어 두툼하게 빚어 굽고, 그 위에 버섯 크림 그레이비 소스를 넉넉하게 부어낸다. 남은 빵 조각 하나, 자투리 고기 한 점도 허투루 버리지 않으려는 그들의 검소한 생활 철학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부드럽고 녹진한 맛의 조화를 만들어냈다. 화려한 기교 없이 재료 본연의 맛을 응축시키는 이 조리법은 아미쉬의 삶과 꼭 닮아 있다.
이 요리의 핵심인 '흰 소스(White Sauce)'를 완성하는 마지막 열쇠는 바로 백후추다. 유럽 요리의 전통을 계승한 아미쉬 레시피는 크림 소스나 으깬 감자처럼 밝은색 요리에 흑후추 대신 백후추를 사용한다. 소스의 순백색을 해치지 않으려는 미적 시도이자 오랜 관습이다.

하지만 백후추의 역할은 단순히 색깔 맞춤에 그치지 않는다. 후추 열매의 껍질을 벗겨내고 핵(과육)만 남겨 건조한 백후추는 흑후추의 야생적인 매운맛과 결이 다르다. 직관적으로 혀에 다가가는 첫 매운맛 뒤로 은은하게 올라오는 쿰쿰한 향. 마치 잘 숙성된 치즈나 젖산 발효를 연상케 하는 이 독특한 풍미는 버섯의 흙내음, 우유의 고소함과 만나 절묘한 시너지를 낸다.
백후추는 소스 안에서 시각적으로는 사라지지만, 미각적으로는 요리 전체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훌륭한 베이스 노트가 된다. 치즈 한 조각 넣지 않았음에도 입안 가득 꽉 찬 풍미가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공동체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아미쉬 사람들의 삶처럼 백후추는 소스 속에 조용히 녹아 들어 가장 깊은 풍미의 그림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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