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후추’ 하면 검은 알갱이를 떠올린다. 후추 덩굴(Piper Nigrum)을 직접 목격할 기회가 없는 우리에게 초록의 싱그러움을 간직한 녹후추와 산딸기처럼 붉게 익은 적후추는 낯설고도 신기한 존재다. 이들은 언뜻 자연 상태 그대로를 건조시키면 될 것 같지만, 고유의 색을 고정하고 부패를 막는 정교한 기술이 뒷받침된 뒤에야 비로소 식탁에 오를 수 있는 ‘현대식 후추’다.
본래 후추 열매는 수확 후 그대로 말리면 효소 작용에 의해 검게 변하며 흑후추가 된다. 녹후추는 이 갈변의 시간을 멈추기 위해 마치 시금치를 데치듯 끓는 소금물에 3~5분간 열매를 담가 효소 작용을 잠재우고, 즉시 얼음물로 식혀 그 선명한 빛깔을 박제한다. 여기에 저온 건조나 동결 건조 기술이 더해지면 풋열매의 싱그러운 아로마를 온전히 간직한 녹후추가 완성된다.
가장 붉게 완숙된 상태에서 태어나는 적후추는 그 존재만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우선, 적후추(Red Pepper)와 혼동되기 쉬운 핑크 페퍼(Pink Pepper)는 이름만 페퍼(후추)일뿐 실제로는 클래식 후추와는 무관한 옻나무과의 열매다. 클래식 후추의 완숙형인 적후추는 한 알 한 알 사람의 손으로 골라 수확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당분이 많은 열매를 햇빛에 말리다 보면 알코올 발효나 부패가 일어나기 쉬워 이를 막아내는 저온 건조 기술이 결합되어야만 온전하게 붉은 빛이 영롱한 적후추를 만날 수 있다.
까다로운 공정 탓에 고가를 호위하지만 그 만큼 컬러 후추의 매력은 대체 불가능하다. 프랑스 미식의 정점인 ‘스테이크 오 푸아브르(Steak au Poivre)’의 영혼이 되는 녹후추부터 요리와 디저트의 세계를 넘나드는 적후추의 화려한 활약까지 미각의 스펙트럼을 넓혀주는 컬러 페퍼의 대표 품종들을 살펴본다.